세례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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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목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교회 3번 정도 주일예배를 참석하셨던 연제환 어르신에게 세례를 드린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건강이 약해지시게 되어 교회에 출석을 못하시게 되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꼭 세례를 받고 싶으시고 하셔서
댁으로 직접 찾아가서 세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날의 건강상태로서는 곧 돌아가실 것처럼 느껴졌었지만,
목요일에 세례받기 전에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 식사도 하셔서 다시 목소리에 힘이 생기셨습니다.
무엇보다 세례를 받는 중에 큰 기쁨이 모두에게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대학교를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나름대로는 친구들과 같이 세례를 받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더 신중하고 의미있게 세례를 받고 싶어서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되기 때문에 교회 선생님을 통해서 담임목사님께 연락을 드렸고,
교회에서는 예정에 없던 세례식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로 담임목사님 사택에서 토요일 저녁에 혼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고 윤성대 목사님께서 인자하신 표정으로 저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셨던 모습이 기억에 납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면서도 너무 감사했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세례를 받는 그 시간은 특별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때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살아가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그 시간을 기억해보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누리며 살아갈 특권과 책임이 있는 존재임을 다시한번 마음에 새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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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참 좋은 세상이라서 GPS에 목적지를 정해놓으면, 다양한 교통수단에 따라 목적지에 가는 방법과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알게된 기능은 원하는 날과 원하는 시간을 설정해 놓으면 그때에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리게 되는지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교통수단 중에는 걷는 방법도 있습니다. 목적지를 정해 놓으면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걷는 속도는 시속 3마일로 계산이 됩니다.
걸어갈때에 우리는 비로소 눈 앞에 있는 것도, 옆에 무엇이 있는지도 볼 수 있습니다.
빨리 가기위해서 뛰어가거나 아니면 차를 이용하게 되면 걸을때 누리게 되는 것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걸어갈때 비로소 우리의 몸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우리 주변을 살펴보고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걷기를 시작할때 몸과 마음은 비로소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일본 신학자 ‘고스케 고야마’ 가 쓴 [시속 3마일의 하나님] (Three mile an hour God)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때 우리의 걸음걸이의 속도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속도를 ‘사랑의 속도’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시간이 걸리고, 사랑은 항상 천천히 움직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속도로 우리를 대하여 주시면 우리는 무엇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결과도 결정되어 있을것입니다.
실수할 때에도 낙심할 때에도 때로는 교만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보폭을 맞추어주십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걸을때 우리의 속도로 걷지 않고, 아이의 보폭에 맞추고 속도를 맞추어 걷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런 속도로 동행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완벽한 사랑의 속도는 상대방과 같은 속도를 맞추어 함께 가는 속도일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변화를 기대해보지만, 그 속도감은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섬기는 교육은 반드시 그 열매가 맺혀질 줄로 믿습니다. 공동체의 교육을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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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20세기 후반 클래식 음악계를 이끈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입니다.
지휘자였고, 작곡가였고, 또한 연주자였던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음악을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과 연주에 대한 진심어린 열정 그리고
매일을 한결같이 연습하였던 성실함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보았던 번스타인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환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각각의 다른 악기들의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소리로 묶어 풀어내는 번스타인의 모습은 흑백의 사진으로 잘 뽑아서 집에 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였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부활을 연주 할때에는 점프를 하면서 지휘를 하기도 했고, 하이든의 교향곡을 지휘할 때에는 손을 사용하지 않고 눈빛과 얼굴표정만으로 지휘를 하였습니다. 지휘하면서 헝클어진 머리조차도, 온 몸을 흔들면서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도 다 멋있었습니다.
제가 번스타인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비단 지휘하는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보았던 번스타인의 공연에서는 악보를 보지 않고 ‘암보'(악보를 외워 기억함)로 공연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주와 지휘의 실력 이면에 있는 그의 ‘성실함’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래서 오늘 목회칼럼의 제목은 “게으름은 배신하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살다보면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꼭 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게을러졌다 싶으면 늘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게으름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고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재능’과 ‘은사’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성실함’일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아서 ‘성실하게’ 우리를 보살피시고, 키워주셨던 부모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리는 한주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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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어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세워놓은 사업체를 자녀중에서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고민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자녀에게 물려줄 것을 마음에 결정하고 아주 적은 액수의 돈을 자녀들에게 똑깥이 나누어 주면서 저녁때까지 빈방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구해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적은 돈을 받은 자녀들은 궁리끝에 첫째 아들은 양 옆구리에 건초더미를 양손 가득 품어서 왔고,
둘째 아들은 솜은 사가지고 와서 빈방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건초나 솜으로는 방을 채울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들이 와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양초를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빈방에 불을 붙여서 빈방을 빛으로 가득채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막내 아들에게 자신의 사업체를 물려줄 것을 유언하고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부활절이 지나고 나면 섬겼던 모든 교회에서 언제나 같은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난 다음날 새벽에 교회 본당에 들어가게 되면, 매년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보다 더 먼저 이곳에 와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로 본당 안에 가득 채우고 있는 백합의 향기입니다. 모두들 떠나고 나서 아무도 없었던 본당에 밤새도록 자신의 향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향기를, 자신이 서 있는 그곳에서 채워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빈 공간, 우리의 관계의 빈 공간, 교회 건물의 빈 공간, 비어있는 모든 공간에 우리안에 계신 주님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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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참석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가기 위해서 비행기를 탔던 시간은 5시간 25분이었습니다.
5시간 25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일 것입니다. 좁은 자리에 앉아서 꼼짝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엘에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서부에서 동부로의 대륙을 횡단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 초에 차를 운전해서 대륙을 횡단하면서 보낸 7일의 시간을 생각해보면 비행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같은 거리이지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시간을 몇배로 줄여서 도착하거나 혹은 몇배로 늦게 도착을 하게 됩니다.
저는 문뜩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갔었던 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장정의 걸음으로는 일주일, 어르신들과 아이들 그리고 가축과 함께 한다면 11일 정도의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가나안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오랜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신명기 8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보시기 위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면, 같은 거리의 목적지를 가는데 있어서 그 시간을 결정짓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의 목적지를 정해놓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고,
빨리 달려갈 수 없어서 간신히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에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하길 소망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원하는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그리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잘 따라, 하나님의 때에 조금도 늦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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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부흥’이라는 찬양을 만드신 분은 고형원 선교사님이십니다.
그 ‘부흥’이라는 찬양이 발표된 앨범 안에는 “영문 밖으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처음 그 앨범이 나온 뒤에 “영문 밖으로”라는 찬양을 들었을때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 찬양가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문 밖으로 영문 밖으로 주님을 따라 나가자, 
온 세상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 십자가 높이 들고서
온 세상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 십자가 뒤를 따라서”
 
나중에서야 이 찬양이 히브리서 13장 13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영문 밖’으로 라는 의미는 ‘outside the camp’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먼저 나가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히브리서 말씀과 같이 ‘성문 안에’만 머무시면서 누리시기 위함 아니라 ‘성문 밖’으로 나가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리는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로 나아가야 할 줄로 압니다.
우리끼리 즐겁고 안전하게 지내는 ‘성문 안’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성문 밖’으로 나아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품고서 ‘성문 밖으로’ 나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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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월요일에 치과치료를 해서인지 컨디션이 계속 안좋았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세미나를 시작으로 화요일 저녁에 세미나 참석과 수요어머니 기도회 저녁에는 리더훈련
계속 진행중인 성경공부와 심방 그리고 매일 준비해야하는 새벽예배와 주일준비로 체력적으로 버겁다고 느껴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몸이 약해지면 생기는 “Cold Sore”가 입술 전체에 생겨서 사실 말을 하고 찬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주에는 유독 갑자기 더워진 날씨가 한몫을 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내던 어느날 오후에 문자를 하나 받게 되었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메세지였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생각하지 못했던 한마디의 격려는 누워서 쉬고 싶어했던 저로 하여금 다시 자리에 일어나 앉게 만들었습니다.
해야할 일을 생각할때 가지고 있던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욱 잘 감당해야 하는 사명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로부터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직원은 상사에게, 상사는 직원에게.
격려를 해주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만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 함께 하고,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담은 한 마디의 격려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를 기다리기보다 바로 지금 내 옆에서 나와 함께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담은 한마디의 격려를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분명 우리 중에 누군가는 자신이 받은 격려를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지경에 있는 모든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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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부산에 있는 수영로 교회의 원로목사님이신 정필도 목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한국에 있을때 저는 부산에서 진행되는 세미나를 참석하는 중에 수영로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고 정필도 목사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일을 하신 참 귀한 목사님이셨습니다. 
“엎드리면 길이 보인다”는 말씀은 고 정필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는 말이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 말이 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은 주님 앞에 엎드리는 일을 하기보다는 고개를 들고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의 도움을 찾는 일을 먼저 하는 것 같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연락을 돌리는 일이나,
내가 이전에 경험했었던 것을 기억해내거나, 뭔가 당장에 손에 잡히는 방법을 통해서 해결을 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이내 기대한대로 되지 않으면 포기하고, 낙심하며,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돌리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듣게 되었을 때에 그는 벽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히스기야 왕이 기도한 모습을 ‘면벽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다른 곳에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작 시간을 써야할 곳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까?’, ‘그 길이 답답하게 보이기만 합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엎드려 주님의 얼굴을 구할때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가야할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엎드리면 길이 보인다는’ 이 단순한 진리가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고, 열매맺게 되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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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역을 할때 저는 신덕교회라는 곳에서 고등부와 청년부 사역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 홍순영 담임목사님은 언어에 특별한 은사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설교시간에 늘 칠판을 두고 한자로 성경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깊이 있는 말씀들을 목사님들 통해서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방에 들어가보면 책상 뒤에 있는 벽에 한자로 글씨를 써놓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본립이도생” (本立而道生) 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려운 한자가 아니기에 읽으면서 대충 뜻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참 이 글이 마음에 들어서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잊어버릴까봐 목사님 방에서 나오자마자 써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본립이도생”,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라는 이 뜻은 신앙적으로 재해석을 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이 바르게 서 있으면 그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재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적용되는 원리에도 그리고 신앙적인 원리에서도 지켜져야할 ‘기본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본적인 것이 지켜지지 않고, 잊혀지게 될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40장 8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변하고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남아있어서
그 말씀,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세워져야 할 기본적인 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잘 세워져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 삶에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이런 시대에
‘믿는 사람’인 우리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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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를 뿌리는 농부는 알고 있습니다. 뿌려진 씨가 시간이 지나면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미리 알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알고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농부는 오랫동안 씨를 뿌렸었고, 자라고 나서 매년 가을에 그 열매를 거두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씨를 뿌려서 열매를 거두어 본 사람은 씨를 보면서 열매를 보는 것처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둬보지 못한 사람은 씨는 씨로만 보일뿐 열매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 나중 예수께서 심판하시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는 가사가 있습니다.
결국 뿌려진 씨는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생기며 열매를 내어서 마침내 주님의 때에 거둘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씨를 뿌릴 뿐입니다. 날씨를 주장하시고, 물이 필요할 때 비를 내리시고, 빛을 밝게 비추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면 마침내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열매가 없는 것으로 낙심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뿌려진 씨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인내하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인내는 소망을 가진 인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는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한 씨, 복음의 씨를 뿌리면 마침내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날에 가장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 높여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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